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 같은데... 무기력감, 권태, 고통 왜 이런 걸 느낄까?
굶주림이나 야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게됨
이후 세상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인생을 즐기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함.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왔지만 결국 행복해지지 않음.
권태로움이라는 악마가 깨어나기 때문에.....
과거 인간은 신과 종교보다 인간 이성의 힘을 믿기 시작
행복은 신의 도움이 없어도 인간의 능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쾌락과 같은 개념이 되었음.
반면 고통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
그런데 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현대인들이 과연 더 행복해졌는지를 생각하면
별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짐
오히려 사람들은 끝없는 권태와 허무감과 같은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함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이성의 힘은 신기루와 같이 작은 인간에 불과하며 감정은 마치 코끼리와 같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 이성의 힘은 신기루의 불과함.
인간의 이성은 본능이라는 코끼리(감정, 본능) 위에 올라탄 작은 인간 기수(이성)에 불과함.
코끼리는 기수에게 당분간은 협조적일 수 있지만,
만약 코끼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재미)
기수는 결코 코끼리를 말릴 수 없음.
그럴 때 기수는 패배를 인정하기보다, 코끼리의 행동을 정당화함.
즉 감정과 본능이 인간의 진정한 주인.
내면의 소리를 따라 행복을 추구하라는 조언은
코끼리가 원하는 걸 들어주라는 말인 셈
만약 그렇게 하면 정말 행복해질까?
우리가 쾌락을 좇을 때 우리 뇌에서 활동하는
가장 극적인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도파민' 일 것
그런데 도파민이 단순히 '쾌락'이나 '행복'과
연관이 있다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훨씬 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실험실의 생쥐를 잘 훈련시키면
버튼을 눌러 먹이를 먹는 훈련등을 할 수 있음.
이때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데, 도파민은 생쥐가 버튼을 누르고 싶게 만듦
이후 생쥐에 뇌에 도파민을 직접 분비시키면, 생쥐는 음식이 나오지 않아도 끊임없이 버튼을 누름
특이하게도 도파민은 생쥐가 버튼을 누르기 전에 가장 많이 분비되며,
예측한 대로 보상이 주어지면, 오히려 도파민 수준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구조.
도파민은 예측지 못한 보상에 가장 크게 변화함.
ex) 버튼을 눌렀는데,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이 나오거나,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때 도파민 수치는 껑충 뛰거나 바싹 가라앉게 됨.
작은 인간의 힘에 불과한 이성이지만, 코끼리를 이기려면? 방법을 알고 행해야한다.
우리가 코끼리의 고삐를 놓는다는 것은
앞으로 이 도파민 신호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겠다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음.
오늘날, 사람들이 도파민을 가장 많이 얻어내는 보상 중 하나가 바로
유튜브 쇼츠와 같은 '숏폼 콘텐츠' 일 것
숏폼 콘텐츠가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탐구욕을 잘 채워주기 때문
인류가 지구의 전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특유의 탐구심 덕분이었을 것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이리저리 모험을 떠나다가
흑요석으로 뾰족한 무기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하거나
과일이 많이 나는 숲을 발견하거나 하는 등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 때마다
인류의 뇌는 '그래 잘하고 있어' 하며
도파민을 뿜뿜 내보내주었을 것입니다.
조상님들도 도파민을 찾아 모험을 떠났는데,
나의 행복을 위해 도파민 플렉스 좀 해보겠다는 게
뭐가 잘못된 걸까요?
과거 조상님들이 얻었던 것과 달리
숏폼 콘텐츠는 원할 때면 언제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보상일 뿐 아니라
어떤 콘텐츠가 나타날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 즉 가챠성을 가지고 있음.
숏폼 콘텐츠는 우리의 뇌에 계속해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면서 도파민을 지속적으로 분비되도록 만들어
사람들을 몇 시간이고 잡아두기에 아주 적합한 형태로 설계되어 있는 셈
스탠퍼드 대학교 로버트 새폴스키 교수에 따르면
이는 '우리가 진화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형태의 자극
"어렵지만 보람 있는 과제로부터..." "미묘한 기쁨의 속삭임을 더 이상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도파민에 대해 더 얘기해 보면, 실험실 생쥐에게서 도파민을 아예 고갈시키면
음식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음식을 찾고 다가가 먹는 행동이 급격하게 둔화되고 줄어듦
그런데 막상 입에 손수 음식을 넣어 주면 행복하게 찍찍거리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임
즉,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는 이야기
도파민은 단순한 쾌감이나 행복감보다는
기대감과 큰 관련이 있음.
도파민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은,
음식을 먹을 때 오는 포만감보다도,
그전 단계인 '식욕'으로부터 오는 것
한편 뇌 속 뉴런이 잦은 도파민 분비로 인해 피로감을 느끼게 되면
같은 자극에도 점점 더 낮은 빈도로 도파민을 분비하게 될 수 있음
그러면 자극이 끝났을 때 도파민이 기본 레벨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도파민이 그보다 더 아래로 추락하게 될 수 있음.
그렇게 되면 뇌는 다시 도파민에 집착하게 될 것.
갈증을 해소하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비슷
허기와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질 것,
중독의 무서움은 피크의 강렬한 쾌감보다 자극을 접할수록
더욱더 심해지는 굶주림과 그에 따른 불쾌감에 있음.
결국 사람들은 기분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욕망하지만
그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닐 수도 있으며,
그 무언가가 정말 기분을 좋게 해 줄지도 미지수인 것
그래서 하루 종일 내 마음대로 유튜브 쇼츠를 보고 설탕이 가득한 음식을 먹어대도
그걸 다 하고 나면 막연히 기분을 잡치는 것
이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분비되고
이 코르티솔이 다시 도파민 분비를 유발할 수 있어 악순환의 고리가 됨
한편 뇌가 지속적인 도파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같은 양의 도파민이 더 이상 같은 정도의 동기부여를 해주지 못하게 되면서
오랜 시간 일정한 노력을 요하는 진짜 중요하고 훌륭한 보상을 주는 일들이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느껴질 수 있음.
코끼리의 고삐를 풀어주고
코끼리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둔 데에 대한 대가가 썩 좋진 않아 보임
무절제한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 절제'가 곧 '자기 사랑'이란 말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님
과거 부처와 같은 많은 지혜로운 선인들도
이러한 이야기를 함.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몸은 항상 현 상태에 적응함.
더 많이 가지고 많이 누려서 행복해져도,
곧 그 상태는 당연한 것이 됨
이상적이고 영원한 행복은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다가가려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뿐
이런 맥락에서 도파민을 주는 활동에서 멀어져
도파민 수치를 내릴 수 있다는 도파민 디톡스가
행복을 추구하는 한 방법으로 추천되기도 함.
사실 도파민은 동기부여에만 필요한 게 아니라
운동능력, 감정조절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상적인 삶에 필수적인 물질임.
만약 정말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도파민 수치를 감소시킬 수 있다면 환자가 됨
그러니까 도파민 분비를 유발하는 모든 자극을 끊고
고행자 모드를 켤 필요는 없음.
그보다는 우리가 권태감과 심심함을 느낄 때
그러한 감정이 생산적인 활동에 대한 동기부여로 이어지지 않고
그 틈새를 쉽고 빠른 즉석 도파민으로 채우는 것이 습관화되면서
다른 활동을 할 동기를 잘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당면한 더 큰 문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독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재발하기 쉽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뇌는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중독에 빠져 있었던 시간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더라도
중독에 빠져 있었던 특정 상황이나 환경에 노출되면
(전기 자극을 즐기는 쥐 실험 등, 개인적인 사견 추가)
뇌가 다시 과거의 자극을 기대하고
도파민을 뿜어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원래라면 치사량에 미치지는 못하는 양의 마약도,
낯선 장소에서 투여되면 뇌의 반응이 전혀 달라져,
투여자가 사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음.
그러니, 가능하다면 값싼 유혹으로부터 환경적으로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 한 가지 좋은 방법일 수 있음.
조금 돌아가는 길, 조금 고생스러운 길을 선택하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신체, 감정 등 모든 것에서
언제나 일정한 균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너무 귀여운 걸 보면 지구를 폭파시켜 버리고픈
공격성이 나오곤 하는 게 한 예죠
이는 뇌가 항상 극단적인 것을, 반대기작(기제?)으로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
이는 쾌락과 고통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함.
분명 이성적인 인간은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만을 추구할 것 같음.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의외로 사람들은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도 싫어하지만,
극도로 단조롭고 행복한 세계 또한 싫어함.
그 중간 어딘가의 세계를 선호함.
또 사람들이 미래의 10,000원보다 지금 당장의 10,000원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예측과 달리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의외로 쾌락을 '일부러' 지연시켰다가 만끽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고통 그 자체에서 쾌락을 느끼기도 함.
생각해 보면 공포영화나 놀이기구는 그 자체만 보면 고문도 그런 고문이 따로 없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걸 '놀이'로써 소비함.
고통이 그 자체로 쾌락을 주기도 하고
고통은 우리를 다시 쾌락에 민감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
간단하게 말하면, 온실에서 벗어나 고생을 좀 해야 한다는 것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행복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함.
진정 나를 위한 것은
무한한 자기애가 아니라
약간의 시련과 자기 절제임.
그럴 때 도파민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음.
출처 : 유튜브 지식은 날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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